마지막으로 보내는 길에

카테고리 없음 | 2013. 4. 3. 00:25
Posted by hyun현
(2012년, 그리고 2013년. 건망증같이 옛 일들을 잊어버리는 내 머리속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이 때를 기록하고 싶다.)

2012년 10월 31일 당신이 둥지를 틀고 바둥거리던 이 세상을 떠난 날. 11월 9일 그 육신을 한 줌 회색 재로 남기던 날. 그리고 11월 13일 긴 여정을 마치고 아버지 곁에 누운 날. 그 날 새벽녘 공항에서 하얀 천 하얀 대리석 안에 당신은 정말 조그맣게 되어 돌아왔다. 내 품 안에서 들어진 묵직한 유골함은 당신을 안고 침대에 누일 때와 같은 무게로 조심스럽고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회색 분골은 생각한 것보다 너무 따뜻해서 겨우내에도 뜨겁던 당신 몸과 같았다.   

2007년부터 4년 3개월 우리는 연인이었고, 그 전 3년여는 친구였다. 연인이라는 관계 안에서 나의 미숙함과 당신의 익숙함은 처음부터 부딪혔고, 우리의 시간을 계속 지배했었다.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뜨거운 열정 안에서의 체온과 시간들과 함께, 납득할 수 없는 당신의 끊임없는 배신에 치를 떨어야 했던 시간이 공존하던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당신의 모습대신 당신의 체취와 체온만이 온 몸의 기억으로 맴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열정의 온도와 방향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함께한 시간 속에서 몸에 베인 습관들은, 당신의 모습이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미래가 되어도 내 일부가 되어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신이 안주하면서도 거부하고 싶어했던 삶의 방식을 변화하고 싶어했기에,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나도 당신도 주변 모두 축하하였다. 이제 혼자 설 수 있는 삶의 터닝포인트라는 것을 알기에, 당신이 출국할 때도, 당신과 헤어질 때도, 그리고 당신과 헤어진 후에도, 당신이 떠났음을 안 날까지도, 정말 새로운 출발점에서 미래로 향해 나가기를 기원했다. 

당신을 깊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 그랬듯이, 나 또한 당신이 떠났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았다. 이미 그 날 밤 꿈 속에서 당신이 떠나는 길을 보았듯이, 깨고 나서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구나라고 잠깐 안도했던 것이, 불과 몇 시간만에 꿈이 아니라 현실이란 것을 알게되었을 뿐이다. 

사람이 그리운 만큼 상대가 원하는 모습으로 분하여 사람 안에서 있기를 원했던 대신, 자신이 자신을 온전히 가져갈 수 있기를 바랬건만, 당신한테 너무 서두른 시도였다는 것에 안타깝고 슬펐다. 그 모든 모습이 당신 자신이고, 그래도 괜찮았는데. 그래서 어쩌면 추모식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어색했을지도 모르는 당신의 모습을 이야기 했다. 더 많은 당신의 모습을 알리고 싶어서, 영웅이기를 원했던 만큼 동시에, 영웅이 되려고 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신 모습까지 보여주고 싶었기에..

활동가로서 당신은 나에겐 어떤 면에서는 가장 많은 것을 함께 나눈 사람일지 모른다. TG운동이 나아가야 할 두 개의 놓칠 수 없는 길을 이야기했던 창동에서의 그 밤도, 지렁이라는 이름을 정하던 종로에서의 그 낮도, 투닥거리던 무수한 회의들도, 고민하던 ftm 게이운동도 tg/is 모임을 얘기하던 작년의 카톡도, 약간은 다른 방식이지만 갈구하던 활동의 형태는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기고글을 써서 보내고 피씨방을 나오던 저번 달의  어느 날 밤 찬 공기에 활동가로서 당신을 잃은 외로움에 사무치기도 했다. 문득, 어쩌면 활동가로서의 당신을 가장 간직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나일지도 모른다. 당신이라는 개인으로서, 내 옛 연인으로서 당신을 남기고 싶은만큼이나.

지금 당신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 곳에서는 이 땅에서 당신을 붙잡고 있던 육신과 성별과 그리움에서도 자유롭고, 당신 자신에게서도 자유로워 있을 수 있기를 간절하게 염원한다.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걸어나갈 수 있는 곳에 거하고 있기를 염원하다. 당신이 가진 두 이름 안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이름을 오롯이 하나로 불리워도 좋은 곳에서 안돈하고 있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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