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정정. 2에서 1로.

카테고리 없음 | 2013. 4. 3. 01:25
Posted by hyun현

(2012년, 그리고 2013년. 건망증같이 옛 일들을 잊어버리는 내 머리속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이 때를 기록하고 싶다.)

2012년 4월 경, 나도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성적지향 성별정체성(SOGI)법정책 연구회'에 예규의 '외부성기' 요건 만족 없이 성별정정을 시도하는 기획신청을 제안하였다. 입법운동으로 가기 전에 법원 단위에서 완화시킬 수 있는 요건으로 제일 먼저 접근하기 쉬운 FTM성기성형 요건 철폐에 도전한다는 의미이다. 법적, 현실적, 정서적 설득의 근거가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7월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고, 예상한 것 보다 빠르게 2013년 3월 15일 1심인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허가 결정이 나왔다.

법원의 긍정적인 반응이 보였을 때부터 기대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다듬느라 정신없었다. 대법원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그 사이에 준비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을 한참 많이 남겨둔 채로 통과되어도 되는가 걱정부터 들었다. 자칫하다가는 단지 하나있는 특이한 지방법원 결정이 될 수도 있고, FTM만 해당하고 MTF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흐름으로 갈 우려도 많기 때문에 그 준비가 안되있는 상황에 우려스러운 것이다. 동시에 내 개인으로서는 기쁨을 누리지도 못 할 멍함에 정신없기도 하였다. 바로 그 '1번'을 받다니, 이제 수십년 발목에 질질 끌고 다니던 족쇄가 풀린다니, 태어나서 날아본 적 없는 새가 어느날 아침 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희열도 희열이지만 당황스러울 정도로 멍멍한 마음이 되는 그런 느낌이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앞으로의 TG운동의 흐름에서 이 사건이 어떻게 그 의미를 바래지 않고 가능한한 많은 힘을 발휘할 것인가. 이렇게 앞으로의 대응과 준비없이 한 발을 내딛어도 괜찮은 것일까. 같이 넣은 친구들의 삶과 현실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인가, 또 한편으로 회한과 부러움과 조급함을 가지고 바라볼 다른 당사자들은. 영화 '트랜스아메리카'에서 주인공이 수술대에 누워 수술실로 들어갈 때 흘리던 눈물이 떠오르기도 했다. 형의 '다리의 족쇄'라는 이야기도 떠오르고, 교수님의 '생존'이라는 이야기도 떠오른다. 또 성별정정 후에 새로운 시작을 기뻐하면서도 서서히 허망함과 우울감에 잠길 수 밖에 없는 당사자들도 떠오른다. 옛 연인이 심문기일 당일 바로 허가의 취지를 듣고 법원 앞에 나와서 발랑발랑 뛰어다니던 모습도 생각난다. 어떤 판사들이 심문 마지막에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에 눈물 흘리던 사람들도 생각난다.

꽃다발도 받고, 사진도 찍고, 페이스북에 올려 해외의 다른 활동가들에게 소식도 전했다. 이 시대의 이 지구 위에 숨쉬고 있는 TG들에게, 아주 작은 한 발이지만 이 한 점 위에 또 하나 하나 쌓아나가면서, 이 땅의 TG들이 태어난 것을 원망하지 않고, 혹은 살아가기 위해 당연히 체념하지 않아도 될 세상에 아주 아주 약간 다가갈 길이 보여서 기쁘다.

이후 대응에 정신없어 바로 로운 주민등록번호를 받으러 가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 실감을 못하고 있다가, 딱 실감이 났던 것이 은행에 개인정보를 변경하러 가서 서류에 내 주민번호를 적을 때였다. 뒤에 7자리를 쓸 때 언제나 '2'를 조심스럽게 썻었다. 양쪽 꼭지를 '자연스럽게' 짧게 써서 언뜻 '1'로도 보일 수 있게 늘 적었기 때문에 손에 힘이 들어가곤 했는데, 그냥 시원하게 거리낌 없이 펜을 일자로 내려그으면 되는 그 감각에 깜짝 놀랄 정도였다. 여기저기 서류에 반복해서 적을 때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이 삐져나왔다.

오늘은 직장 신분증(공무원증) 뒤에 주민번호 뒷자리에 붙여둔 흰색 스티커를 떼어냈다. 어찌나 시원하게 보이던지, 번호를 가리기 위해 붙여둔 것 없이 그냥 말끔한 신분증 면이 통쾌할 정도였다. 참으로 별 것 아닌 것이 참으로 별 것이란 것이 느껴졌다. 밋밋한 평면의 신분증 위에 늘 1.5cm가량의 작은 스티커가 튀어나와 있어야 했던 것(스티커를 밋밋하게 보이기 위해 꾹꾹 눌러서)이, 마치 길 위에 방지턱이 있었던 것 같다. 결코 차가 쭉 달려나갈 수 없는 길, 매끈한 유리 표면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있듯한 그 신분증.

이제 주민등록증을 지갑 안에 뒤집어서 넣지 않아도 된다. 신분증을 제시할 때 눈치를 볼 것도 한 쪽을 아무렇지 않게 가리는 행동도, 물어봤을 때 적절한 웃음으로 넘기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도 필요없어졌다는 것이다. 주민번호가 적혀 있는 서류나 종이를 뒤집어서 책상위에 올려놓을 필요도 없다.

새삼 뒤집어서 넣어야 하는 주민증과 반반한 주민증 위에 덧붙여 튀어나와 있는 종이조각이 TG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사회를 등지거나 도드라져 보이지 않게 꾹꾹 눌러담아야 하는 마음으로 신분증을 꺼내야 하는 TG들의 삶말이다.

 

 
블로그 이미지

hyun현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2)
TG와 법 (0)
TG와 만화 (0)
잡다한 일상 (0)